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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개전 3일—나라의 운명을 가르다?

2009.06.22 13:58 2,422 30 0 0

본문

—블루 스타를 기리며—

이제는 잊혀져가는 한국전쟁에 대한 짧은 소견입니다.
물론 그 짧은 소견을 피력하기 위해 구성된 내용은 무지하게 깁니다.

흔히들 많이 얘기하는, 한국 전쟁의 기원, 원인이나,
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전쟁 과정에 대한 정치적 평가, 전쟁 발발의 책임 소재 등,
뭐 이런 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조리 치워버리고, 오로지 전투 과정만을 기술하였습니다.

제가 25년 전 전방에서 사병으로 군복무하던 시절에
우연한 기회에 읽어보게 된
6.25 전쟁 동안의 주요 전투상보(戰鬪詳報)를 실어 놓은 책의 내용을 기억 속에 담아 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최대한 세밀하게 기억을 재정리해서 쓰게 된 글입니다.

저는 당시 그 책을 1년에 걸쳐서 15회 이상 정성을 다해 탐독했지요.
이런 내용은 민간인이 되면 못보지 싶어서, 아주 열심히 보았고,
심지어 가능한한 모든 내용을 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고등학생이 입시를 위해 국사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과 비슷했지요.

당시에는 워낙 군관련 정보의 통제가 심하던 시절이라,
이 것도 일종의 군사 정보로 보여서
(사실 그 책의 표지 안쪽에 2급 군사 기밀이라고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지요)
그 희소성에 주목해서 열심히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사실 지금 이 글은 오로지 그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 글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세월이 25년 이상 흘렀으니,
이제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6.25관련 정보와 문헌을 수월하게 획득할 수 있고
또 획득되는 정보의 질도 매우 높을 것입니다.
또, 6.25 전사(戰史)를 연구하는 많은 민간 연구 기관이나 연구자들도 다수 배출되어
그로부터 생산되는 연구 저작물들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한국 전쟁의 주요 전투와 관련한 다양한 군사 정보도 추가로 많이 발굴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상당 부분은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한국전쟁 전투상보와 관련한 자료나 서적을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서 읽어보기는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기존의 기억을 최대한 세밀하게 되살려서 이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다만,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 부대 명칭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서 참조하여 최대한 정확성을 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의 기술 내용 중에는 부정확한 사항이나, 표기상의 오류,
사실 관계가 어긋난 내용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선 분명히 밝혀드립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물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 단순하지요.
6.25 전쟁 하면 흔히들 그 국제 정치적 배경이나 역사적 성격,
또 6.25 전쟁의 평가와 관련한 학문적 정치적 대립 구도, 전쟁의 영향 등등 뭐 이런 면에 대해서는
여러 분들이 정말 많이들 알고 계시는데,
정작 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에는 너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가진 작은 교양이나마 이 기회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 몸의 소박한 동기에서 이 글을 적게 되었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는 바입니다.

육군에 입대, 전방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FM 대로의 전술기동훈련,
대대 ATT, 중대 ATT 뿐만 아니라  특히 RCT을 받아보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의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같은 사병 출신들은 최전방 부대나 전방 예비 사단에서 RCT 훈련을 받아보아야
전방 지역 국군 부대들의 기본 작전 개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이, 이 글을 이해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기본 소양이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나 여성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미리 드립니다.
물론 장교 출신들이야 뭐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글을 끝까지 정독하는 분이 혹시 계시다면, 가차없이 댓글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는 풀빵이 아니라, 반드시 맥도널드 빅맥 세트 하나씩 선물로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ㅋㅋ


    이제 본 내용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1. 전쟁 직전의 상황

해방후 1948년 8월과 9월에 남북한에 각각 별도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이 공식화되었고,
북한 정부의 요구에 의해서 1948년 10월부터 소련군이 철군을 시작하고,
남한 정부의 계속 진주 요청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에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주한 미군이 완전 철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잠정적인 미소간의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이 결국 사실상의 국경선이 되어버렸지요.
1950년 1월에 애치슨(Acheson) 라인이 발표되었는데,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 남북간의 맹렬한 군비 경쟁

북한 : 1948년에 이미 4개의 보병사단과 전차 부대가 편성되었고,
   전쟁 직전까지 중국 팔로군에 소속되었던 4만 여명의 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해서
   주로 인민군 제2군단에 편제되기 시작하면서,
   전쟁 발발시에는 전방 지역에만 10개 보병사단 이상의 병력이 배치 완료되었습니다.
   총병력은 20만명, 전차, 자주포 240대, 각종 야포 700여문, 함정 100여척, 항공기 200여대로
   당시 신생 국가 중에서는 최상위에 상당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남한 : 1946년 1월 국방경비대 창설, 1948년 8월 해안경비대 창설 이후 미국의 지원하에 본격적인 무장을 시작했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육군, 해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해 10월에는 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전쟁 직전에는 8개 보병사단에 10만 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북한보다는 못하지만, 당시로서는 급속한 군비 확장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전차는 없었고, 야포는 91문, 함정 70여대, 항공기 20대 정도였습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군 수뇌부들은 이런 정도의 무장력을 가졌음에도
그 급속한 군비 확장에 도취되어서, 아주 쉽게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한 인민군의 엄청난 전력 증강 규모나 속도에 무지했다는 증거이지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뭐 이런 식으로들 떠들어댔지요.
이러한 허망한 자신감의 근거가 또 하나 있긴 했습니다.
48년에 극렬하게 빈발하던 남한 내의 좌익 무장 게릴라들의 준동에 대해,
국군과 경찰 부대의 진압 능력이 49년을 넘기면서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었고,
결국 대체로 성공적인 진압을 이루어 낸 것이
그 자신감의 또다른 배경이 되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3. 전쟁의 징후 (기억나는 것만 적었습니다)

※ 1950년 3월 중순, 이북 지역의 38선 일대 민간인을 후방으로 소개시키기 시작함.
※ 1950년 3월 하순에 인민군 수 개 사단이 38선 인근에 전진 배치되고 있는 사실을 포착함.
※ 1950년 4월 이후 인민군의 남침 징조가 전 전선에 걸쳐서 관찰되기 시작함.
※ 1950년 4월 하순에 비행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장교가 전쟁 발발을 경고함.
※ 1950년 6월 중순, 남한 정보당국이 북의 전쟁 준비 사실을 확실히 인지함.
※ 1950년 6월 22일 무렵, 38선 일대의 인민군 포병부대의 포신이 전부 남쪽을 향해서 일제히 추진, 방렬 시작.
※ 인민군 차량 이동의 급속한 증가, 38선 인근에서 도면을 소지하고 지형정찰을 하는 인민군 장교를 빈번히 목격함.
※ 1950년 6월 22일 이후 육군본부 정보 계통에 전방 각 사단에서 올라오는 적 이상 징후에 대한 보고가 빗발침에 따라
 육본 정보국(국장; 장도영)이 참모총장(채병덕)에게 적의 남침 가능성을 보고함.
※ 참모총장 채병덕은 이러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미군 정보당국의 '남침 가능성 낮다'는 판단에 의거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함.


4. 개전(開戰)과 인민군의 전략

인민군 총참모부는 작전을 크게 3단계로 계획하였습니다.

 1단계 :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한다.
 2단계 : 전과를 신속하게 확대한다.
 3단계 : 남해안까지 진출하여 국군의 잔여 병력을 완전히 소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1단계의 작전입니다.
이 글에서는 제1단계의 작전에 대해서만 검토하고
그 실천 결과로서의 초기 전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고자 합니다.

1단계 작전은 그 세부적인 진행 단계가 있습니다.
우선은 개전하자마자 신속하게 38선상에서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을 섬멸하고,
한강 이북에서 패한 국군의 퇴로와 후방에 있는 국군 3개 사단(2, 3, 5사단)의 증원을 차단한 다음,
서울을 최종적으로 점령하고, 이어서 <수원 —원주—삼척> 선까지 인민군을 진출시킴으로써
<인민해방전쟁의 1단계 작전 목표>를 완료한다는 내용이지요.

이 작전은 38선에서 <수원 —원주—삼척> 선까지 작전 종심 90km를 설정하고, 작전 기간은 5일로 정했습니다.
당시의 주요 작전 기동로는 현재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로였습니다.
원래 이북 지역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은 예로부터 정해져 있었지요.

경의선(개성 ➞ 파주,문산 ➞ 수색&#160;&#160;➞ 서울 서북),
경원선(동두천, 포천 ➞ 의정부 ➞ 서울 동북),
경춘선(인제, 춘천, 홍천&#160;&#160;➞ 가평&#160;&#160;➞ 서울 남쪽, 수원) 이렇게 말입니다.
당시 인민군의 초기 작전도 이 경로를 따라 이루어졌지요.


인민군 총참모부(총참모장 ; 강건, 전선사령관 : 김책)는

(1) 주공(主攻)인 인민군 제1군단을 동원해서, 중서부 전선을 돌파하도록 했는데, 그 주요 공격로를 보면,
  1사단은&#160;&#160;경의선을 따라 기동(문산 → 수색)하면서 서울을 직접 공격함,
  4사단은&#160;&#160;동두천 → 의정부 → 수유리 방면으로,&#160;&#160;
  3사단은 포천 → 의정부 → 퇴계원 → 상봉동 → 청량리, 화양리 방면으로 돌파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울을 압박하는 한편,

  인민군 6사단이 개성 → 김포 → 영등포(즉, 전방 국군의 후방인 한강 이남)로 진출해서,
  춘천 → 가평 → 경기도 하남으로 진출하는 인민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과 함께&#160;&#160;한강 이남에서,
  전방에서 퇴각하는 국군 주력을 포위 격멸하고, 후방의 국군 예비사단들을&#160;&#160;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먼저 서울 동북방을 공격 돌파한 인민군 105 전차여단이 한강교를 개전 2일째에 조기 점령하고,
  이를 통해서 국군의 퇴로를 일차로 전면 차단하며,
  인민군 2군단 예하 603 모터사이클연대가,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통과하는 교통 요충지인,
  수원 남부지역을 전격 점령해서 한국군의 퇴로를 후방 지역에서 다시 한번 차단하고,
  1차 포위망을 탈출, 퇴각해오는 잔적을 소탕함과 아울러 후방의 국군사단의 증원 병력을 차단, 공격하는 작전입니다.


(2) 조공(助攻)인 인민군 제2군단은 중동부 지역인&#160;&#160;<화천—양구> 및 <동해안 축선>에서 38선을 신속히 돌파하여
  서울 동북방 및 수원방향으로 우회 공격을 감행하고,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진출하여 국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수 상륙 부대인 766부대와 549부대는 동해안에서 국군 후방지역인 <정동진> 등에 상륙하여
  동부 전선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38선에서 국군 8사단을 공격하면서 남으로 밀고내려오는 인민군 제5사단 등과 협공하여
  국군 제8사단을 섬멸하는 작전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개전 당시 인민군 전방 주요 부대의 배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민군 제1군단은 황해도 금천에 지휘소를 두고,
서부전선으로부터 6사단, 1사단, 4사단, 3사단의 순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3사단은 1군단 예비로서 군단사령부에 주둔하고 있었지요.

인민군 제2군단은 강원도 화천에 지휘소를 두고,
서쪽으로부터 2사단, 12사단, 5사단의 순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역시 제15사단은 2군단 예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전 당시 38선 지역의 국군 부대의 배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국군은 총 8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맨 서쪽 황해도 남쪽 해안지대(옹진반도 등)에는 육군 독립 17연대,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제1사단(개성, 문산), 제7사단(동두천, 포천), 제6사단(춘천, 홍천), 제8사단(강릉)이 전방 부대로서
38선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었고, 사단별로 광정면 80km 내외의 지역을 담당했고,&#160;&#160;서울 지역에는 수도사단이 있었습니다.
후방에는 삼남 지방에 1개 사단씩,
그러니까 2사단(대전, 충청권), 3사단(광주, 호남권), 5사단(대구, 영남권)이 예비 사단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1. 옹진반도 전투 (독립 17연대)(완료)

국군 독립 17연대와 제11 포병대대는 병력 3,600명에 각종 야포, 기관총으로
인민군 제6사단 14연대, 38선 제3경비여단 등 병력 1만 5000명과 맞섰으나
24시간만에 국군이 1천명 이상 사상당해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주저항선이 동서로 양분되자
연대장은 그 지역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해상 철수를 단행키로 했지요.
그 후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3대대는
부포항에서 26일 오전 해군 LST를 이용해서 인천으로 철수했고,
제1, 2 대대와 연대 직할대 낙오병들은 사곶항에서 민간 선박 편으로 철수했습니다.
이어서 27~28일 사이에 인천을 경유, 수원으로 집결해 육군 예비가 되었습니다.



2. 개성-문산 지구 전투 (보병 제1사단) (완료)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접근로에는 국군 제1사단이
<청단으로부터 고랑포>에 이르는 약 94km의 광정면을 두고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제1사단은 제12연대와 제13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160;&#160;제11연대는 사단 예비였습니다.

그러나 제1사단은 방어정면이 너무 넓다는 약점 때문에
적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 될 때에는 신속히 임진강을 넘어 후퇴한 다음,
임진강 남안의 야산 능선에 <주방어선>을 설정하여&#160;&#160;방어진지에서&#160;&#160;고수방어를 수행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남쪽 예비진지>로 철수해서 방어한다는 기본 작계를 세워두고 있었지요.
이 것은 제가 복무하던 80년대 중반에도 대략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6월 25일 현재, 국군 제1시단의 병력 현황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대원 1/3이 휴가 중이었고, 나머지 1/3이 역시 외출, 외박이 실시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총병력 60%가 부대를 이탈한 상태였지요.
심지어 제12연대는 광정면 80km의 방어 정면에 불과 800여명이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보유차량의 대부분은 정비차 후송된 상태였고
대부분의 공용화기는 수리 정비를 위해 후방인 부평으로 이송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인민군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지역을 예하 제6사단과 제1사단
그리고 105 전차여단 소속 기계화 연대를 선봉으로 삼아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합니다.

당시 국군 제1사단은 제12연대가 개성을, 13연대가 문산을 지키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예비로 사단본부와 함께 수색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160;&#160;

제12연대 정면에는 인민군 제6사단이 206 전차연대를 선봉으로,
제13연대 정면에는 인민군 제1사단이 203 전차연대를 선봉으로 공격했습니다.&#160;&#160;

기습을 당한 국군 제1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오로지 사단 예비인 제11연대가 휴가와 외박을 나간 장병들을 모두 불러 모아 반격할 때까지,
제12연대는 임진강을 배수의 진으로 삼아 버티고,&#160;&#160;
제13연대는 12연대가 인민군 1사단에게 포위당하지 않도록 문산을 사수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구체적인 전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제12연대 전투 상황

 a. 청단-백천지역 전투 (제12연대 3대대)

  제12연대 3대대는 읍천에서 예성강 동쪽 전포리까지 54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160;&#160;
  산간 소도로 5개소에 정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이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인민군은 <공격준비사격>도 없이
  기습적으로 접근하면서 사격을 가하고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실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3대대는 국지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청룡반도와 용매도, 백석포, 김포반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고,
  결국 일부 병력이 분산 소실되었습니다.


 b. 개성지역 전투 (제12연대 2대대)

  제12연대 2대대는 예성강 청학동 소반 고개 간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5,6,7)를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개전 당시 인민군 제6사단 15연대는 전차 수대(5~6)를 선도에 배치하고
  1번 도로를 따라 개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비치된 제6중대는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하자마자 중대장이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분대 단위로 분산되고 말았습니다.
  여현일대를 경비하던 제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 시작하였으며,
  비둘기 고지에서 교전하던 제7중대도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자남산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제12연대장은 이날 09시에 상황을 분석한 끝에
 1번 도로가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때마침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1대대가 배치된 고남리로 내려오던 제2대대장과 조우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적에게 역습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연대 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반격이 가능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철수중인 제2대대에
 이와 같은 어려운&#160;&#160;임무를 부여한 것은 상당히 무리한 전술 운용으로 판단됩니다.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부상당하게 됩니다.

 이때, 연대 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를 경유, 김포반도의 강녕포로 도강하여
 통진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습니다.


2) 제11연대 전투 상황

 c. 문산지역 전투 (제11연대)

  제11연대는 25일 08시 30분에 출동하여(수색을 출발)
  11~15시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때 출동한 병력은 수는 겨우 980명이었습니다.
  적전리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 철교 부근 마정리의 1번 도로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휴가, 외출 장병이 복귀하기 시작하여 연대 병력이 1,500명으로 증가했지요.

  제11연대는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인지한 후,
  사단장에거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 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했으나,
  불발에 그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인민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 병참선으로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까지는 아직 인민군 전차가 전선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철교의 조기 폭파를 예상하고, 전차를 1번 도로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 완료했을 때인 25일 17시 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1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적과 조우하여,
  치열한 총격전이 발어졌으며, 인민군은 임진강 철교 부근에거 일차 격퇴되었습니다.
  그 뒤 인민군 제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 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했지요.


3) 제13연대 전투 상황

 d.&#160;&#160;파평산 전투 (제13연대)

  제1사단의 우전방을 담당했던 제13연대는 제1,2 대대를 파평산에 투입하여,
  인민군이 가여울-적성-문산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테세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인민군 1개 대대 가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국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지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에서 적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에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으나, 전차 특성을 숙지하지 못하고, 사격술이 미숙하여,
  전차에 전혀 손실을 입히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제1대대장는 18명의 대전차 특공조 2개를 편셩하여,
  81미리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으로 묶어 온몸에 두르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돌진하니,
  적 전차가 진격을 포기하고 도로변에 정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길 옆의 초가집에 불이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붙게 되었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후속 인민군 전차대는 적성 방면으로 퇴각했습니다.
  그 얼마후 인민군 1개 연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이 치열한 근접 사격전을 펼친 끝에,
  진지 방어에 성공하고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잠시 소강상태 이어졌습니다.


4)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제1사단 주저항선의 붕괴)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제15연대, 제20연대, 제1연대 일부)를 배속받아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상환 전전에 따라 반격으로의 전환을 검토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측의 인접 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축석령선으로 후퇴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히 인민군에 노출됨에 따라,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인민군 제1사단은
국군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강 철교가 여전히 건재한 것을 알고, 임진강 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선도로 세우고,
보,전,포 협동 작전으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 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 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했으나,
대 전차 화기와 전술이 미비함에 따라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인민군은 의외로 진격을 잠시 멈추고, 후속 부대를 기다리며 대기상태에 들어갔는데,
이에 1사단 지휘부는 역습을 감행, 잠시 주저항선을 돌파했던 인민군을 임진강 북쪽으로 패퇴시키고,
주저항선을 일시 회복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바로 이때,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면으로 육박한 인민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그쪽 지역의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13연대는 26일 저녁에 문산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단장은 <최후 저지선>으로의 철수를 결정, 거기서 마지막 결전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야간을 틈타 철수를 계획했으나,
인민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전 전선에서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국군 제1사단은 철수 명령을 하달하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으로 이동 설치했습니다.

국군 12연대를 추격하던 인민군 제6사단 예하 부대는 6월 27일에 김포 지역에 진출,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조망할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의 김포반도 대안 변에 있는 봉성산 등을 확보해서,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 통제하는 한편,
신전동에 있는 138고지를 장악, 김포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했습니다.

이에 행주나루로 후퇴하던 국군 병력은 여러 부대가 혼재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적의 불시 기습 사격에 강변 일대의 갈대밭에서 각개 분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인민군 제1사단, 제6사단과 제203전차연대(T-34/85형 중(中)전차 보유)가 침공하자,
청단-개성 일대에 배치된 제12연대는 초전에 분산되어
영정포에서 한강 하구를 도하하여 김포반도와 문산리로 철수하고,
38도선의 대원리-원당동 간을 방어하던 제13연대 3대대도 임진강 남쪽으로 분산 철수했으며,
사단 예비였던 제11연대는 수색을 출발, 25일 오후 문산으로 이동해서 주저항선을 점령, 방어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주저항선을 내주고 후퇴하여
봉일천 일대를 <최후 저지선>으로 삼아,
추가로 제15연대 일부, 제20연대 제3대대,&#160;&#160;혼성전투연대(서울특별연대) 등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 실시하면서 악전고투하던 중,
 
6월 28일 새벽에 이미 서울이 인민군 3.4사단에 의해서 점령되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이 전선에 알려짐에 따라,&#160;&#160;
1사단 지휘부는 행주산성 주변으로 후퇴하면서
전 사단 병력에게 도강하여 30일 18시까지
시흥지구로 재집결하라고 명하고, 분산 후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중화기와 각종 장비를 유기하고, 한강을 건너 퇴각했습니다.
물론 병력 손실도 대단히 컸습니다.

개성, 문산 전투는 이렇게 해서 결국 국군 제1사단의 후퇴로 막을 내렸습니다.
다만, 국군에게 다행스러운 것이 있었다면,&#160;&#160;인민군 제1사단의 진격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었기 때문에
국군 제1사단 주력이 완전히 포위 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80년대에 이 부대에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대대 ATT, 중대 ATT, 그리고 RCT,
군단 기동 훈련, 을지 연습 등의 훈련을 수행하였습니다만,
그 훈련 기간이나 춘,추계 진지 공사를 할 때,
위에 말씀드린 임진강 남안의 제1사단 주방어진지 일대를 둘러볼 기회가 많았지요.
제가 근무하던 당시에도 방어진지의 상당 구간은
1950년 당시와 겹치는 상태여서, 전쟁 후, 새로 구축한 진지들 부근에
옛날 진지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특히 진지 공사 도중 오래된 마대 자루가 삭아서,
마대를 들어내고 새 마대에 흙을 담아 다시 쌓는 작업을 많이 했었습니다만,
그 엣날 마대에서 나온 흙에서 가끔 M1 소총 실탄(8발 들어 있는 탄창),
깨진 철모 조각, 녹슨 군용 허리띠 버클, 숟가락, 심지어 드물게는 녹이 잔뜩 난 인민군 방망이 수류탄,
60mm 박격포탄, 뭐 이런 것들이 발견되곤 했지요.

특히, 위에 말씀드린 제1사단 관련 전투 상보를 읽고 난 다음,
각종 기동 훈련을 수행하거나, 그 때의 전투 지역에서 각종 작업을 할 때면,
괜히 비감해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3. 의정부 방면 전투 (보병 제7사단) (완성)

개전시 인민군의 실질적인 주공(主攻)이 지향된 동두천·포천지역에는
국군 제7사단이 38선 경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제1연대와 제9연대가 사직리-적성 간의 50여km에 달하는 광정면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동두천 정면에는 제1연대,&#160;&#160;포천 정면에는 제9연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당시 일부 육군 사단 간에 부대 재배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사단 예비로 쓸 수 있는 연대 하나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제7사단 방어지역을 공격한 인민군은 제105전차여단의 지원을 받는 2개 정예 사단이었지요.
그 중 인민군 제3사단이 포천 방향으로, 제4사단은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했습니다.

사실 이곳은 개전 당시 인민군의 가장 중요한 공격 경로였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병력 배치도 당연했지요.
전체 인민군 중에서 최강의 정예부대인 제3, 4사단과 유일한 기갑여단인 제105 기갑여단의 주력을
철원-연천 부근에 사전에 집결시켜서, 개전 당시 가용한 인민군 전차의 대부분을
이곳 동두천, 포천 지역의 경원선 일대에 집중 배치하고 공격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a. 동두천 지구 전투 (제1연대)

개전 당일 새벽, 인민군은 초성리, 양원리 적암 일대에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했습니다.
사실 38선상의 국군 제7사단의 초소와 진지가 규모나 투입된 병력의 규모 면에서
미미한 상태임을 관측을 통해서 충분히 숙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전 가용 화력을 총동원해서 집중 포격을 30분이상 맹렬하게 퍼부었습니다.
이 때의 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은 주로 3번 도로와 그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인민군 제4사단은 전곡-동두천간 3번 도로에 주공을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봉암리 접근로에 조공을 투입하여 보전 협동 병진 공격을 일제시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국군 제7사단 제1연대는
비상출동 대기부대 임무(요즘 말하자면 5분 대기조 비슷)를 맡고 있던 제3중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초성리 남쪽의 작은 고지에 진출시켜, 전차와 함께 행군종대로 남하 중인 인민군 부대를 기습 격퇴하고,
소요산 일대에 있던 제2대대의 지휘하에 배속하도록 하었습니다.

제2대대는 소요산 일대에서 개전 당일 이른 아침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어진지를 사수하면서
적의 강력한 공격을 넓은 방어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습니다.
한편 제1대대는 마차산에 투입되고, 제3대대는 봉암리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에 투입되기도 전에
이미 인민군이 이 고지를 우회하여 간파리 방향으로 남하 중이었고,
이에 제1대대는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에 대비한
지휘관의 신속한 판단이 요구되는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에서 어떤 명령을 하달해 주기만 기다리면서
마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멀리 보이는 소요산 교전 상황을 마냥 구경만 하고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봉암리에 배치된 제3대대의 정면에도 어떠한 적의 출현 징후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 개전 당일의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제1연대의 2개 대대는 그냥 대기만 한 채 시간을 허송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제1연대를 지원하던 제5포병대대는 주저항선 후방의 진지에 투입한 후,
밀집대형으로 남하 중인 인민군 1개 대대를 집중 타격해서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도 있었습니다.
또 제1연대 57mm 대전차포 중대장은 적전차 2대를 측면을 조준 사격하여 파괴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인민군의 퇴각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날 15시를 기해 인민군 제4사단은 107전차연대를 선두로 해서,
동두천을 일제히 맹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제7연대 2대대는 10여 시간의 전투끝에 결국 패배하여 철수하게 되었지요.
결국 국군의 주저항선은 돌파되었고, 곧바로 인민군이 동두천 시내에 진입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차산의 제1대대는 유무선 통신 두절로 인해서 철수 명령이 하달되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그냥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b. 포천 지구의 전투 (제9연대)

인민군 제3사단은 제109 전차연대와 협동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국군은 제9연대가 방어에 나섰습니다.

25일 새벽 3시 40분경 일제히 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접 인민군 제4사단의 공격준비사격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인민군의 포격이 아군의 경계 진지와 배치된 병력 주둔 지점에만 정확하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인민군 부대들도 지휘부의 전술 능력에 따라,
적정을 사전에 탐지하고 공격 계획을 수립하는 능력이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이지오.

이 때, 국군 제9연대의 일선을 담당했던 부대는 제2대대였는데,
인민군의 엄청난 공격준비사격으로 큰 곤경을 겪은데다,
곧이어 전차 여러 대를 앞세운 인민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서
수많은 병력이 손실되고, 제대가 분산되어 뿔뿔히 포천 방향으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포천에 주둔하던 대대 본부는 일선의 위급함을 연대로 보고하고,
증원 병력을 요청함과 아울러 특히 대전차 화기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원래 9연대장이 첫 보고를 받은 시각이 04시 30분경이었습니다.
당시 연대장은 보고를 받자마자,
제1대대, 제3대대로 하여금 쳔계산-가랑산 간의 주방어진지를 점령토록 하고,
기존 작계대로 방어전을 펼치면서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동시에 제2대대장에게 현위치에서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치도록 지시했습니다.
뭐 당연히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출동 테세를 갖추고
진지에 투입 완료되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지요.

한편 연대 대전차포 중대로 하여금 57mm 대전차포를 가지고 만세교로 직행해서,
인민군 선도 전차부대의 예봉을 꺽도록 조치하고,
2.35" 로캣포 12문을 모아 역시 만세교 부근의 요선으로 급파했습니다.

한편 그 부근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있던 제2대대는 일선의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북만세선상의 진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08시 무렵 인민군이 다시 43번 도로를 따라
일제히 공격을 가하면서 밀고 내려오자, 북쪽 기슭의 진지에서 기관총 화력으로 집중 사격하였지만,
선두 전차가 만세교 북쪽 300m 지점에서 일단 정차한 후,
포구를 돌려 그 북쪽 진지를 향해 반격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북쪽 기슭에 있던 제5중대는 모든 가용 화력을 인민군 전차에 집중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던 차,
마침 연대에서 급파한 대전차포 중대가 만세교에 도달하여,
인민군 전차를 50m 전방까지 끌어들여 사격해서 명중했지만, 전차는 별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국군 대전차포 중대 진지에 포격을 연발하고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포격을 가했으나 역시 효과가 없어 결국
공포에 잠긴 대전차포 중대 병사들은 포를 유기하고 조준경만 간신히 챙겨
신평리 방향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인민군 제3사단은 25일 새벽에 38선을 돌파하고 그 10km 남쪽의 만세교 부근까지 진입한 후,
잠시 전열을 정비하고, 10시 30분을 기하여 강력한 재공격에 나셨습니다.
(만세교는 오늘날 포천 북북동쪽 43번 국도상에 있습니다.)
인민군 제3사단 제7연대가 43번 도로 쪽으로 공격하고,
제9연대는 서쪽의 325번 도로로 우회하여 포천을 직접 함락하고자 했지요.
특히 이 지점에 인민군 포병 화력을 집중시키고, 기계화 부대를 선도로 해서
국군 제9연대의 주저항선의 중앙부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국군 제8연대는 병력이 부족해서 43번 도로의 양측 고지에만 진지를 편성했을 뿐이고,
서쪽 측방은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고, 대포병 장비나 대전차 화기가 없어서,
사실 방어가 거의 무망한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인민군 선도 기계화 부대는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저항선을 통과하고,
적 보병만이라도 저지코자 노력했습니다만, 인민군의 강력한 정밀 포격에 초전에 분쇄되었고,
통신 두절이 겹처 예하 제대간의 작전 통제 기능도 마비된데다,
탄약도 고갈되어 병력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진지만 지키다가,
드디어 14시경 결국 제9연대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습니다.
결국 연대는 통신 두절된 제3대대는 남겨두고, 본부와 제1대대만 철수를 단행했습니다.

철수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제3대대는 가랑산의 진지를 계속 지키다가,
그날 밤 단독으로 철수하여 왕방산-회암령을 거쳐 동두천 가도에 있는 덕정 부근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이 낙오, 실종되어서
다음날 아침 옥정리에 집결하여 파악된 숫자가 1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 뒤 이 병력은 제1연대에 합쳐져서 의정부로 후퇴하고
다시 남하하여 서울 우이동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국군 제7사단 제9연대는 포천 정면에서 인민군 제3사단과 대결하여
심각한 패배를 당하고 전력이 분산되어 전투력이 거의 고갈되어 버리고,
제1대대만 그런대로 수습되어 서울 태릉에 재집결하게 되었습니다.


 c. 제3연대의 증원 투입 (수도사단 예하)

포천 정면에서 제9연대가 고전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25일 정오에 육군 지휘부에서 수도사단 예하의 제3연대를 급파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제9연대의 주저항선이 붕괴되어 인민군 보병 부대가 탄장(만세교와 포천시내 사이)을 통과한지
1시간 이상 경과했고, 기계화부대는 이미 벌써 포천 시내에 진입했는 바,
결국 제3연대장은 포천에서 남남서쪽으로 3km 정도 위치에 있는
송우리에서 급편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에 2개 중대씩 배치하고, 11중대가 43번 도로 주변의 중앙을 담당케 하여,
그를 위한 진지 작업에 돌입하고,
제1대대장은 동쪽 2개 중대를 지휘하고, 제3대대장은 중앙과 서쪽의 3개 중대를 지휘함으로써
두 대대를 투입한 방어 테세를 갖추고,
연대장은 연대 관측소를 설정하고 제3대대장과 함께
관측소가 있는 고지에 올라가 본대를 지휘하면서,
57mm 대전차포 2문을 그 동쪽의 도로변에 배치하고 통신망을 가설했습니다.

이날 17시 경, 아직 진지 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시점에
드디어 인민군의 강력한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곧이어 인민군 기계화 부대가 도로를 따라 나타나서 1,500m 전방에 다다르게 되었지요.
이에 송우교 양쪽의 2개 대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고 연대 중화기도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각 중대의 기관총도 일제히 난사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이무렵 흔히 그렇듯이 인민군 기계화부대는 별 타격없이 계속 전진하다가,
선두 2대의 전차가 정차 후, 연대 관측소를 조준하여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10여대의 전차가 가세해서 포격과 기총을 난사하여
송우교 좌우의 국군 2개 대대를 집중 공격하니,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화기 중대의 타격이 매우 심했다고 합니다.

연대 대전차포 중대는 이 때 57mm 대전차포와 2.36" 로켓포를 사용해서
인민군 전차를 요격했으나 명중에도 붐구하고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민군 전차의 강력한 응사에 무력하게 붕괴되어 버렸지요.

이에 인민군 전차는 송우리의 방어선을 돌파하게 되었고,
곧이어 엄청난 규모의 후속 보병 부대가 전차와 자주포, 각종 차량과 함께,
나타나 밀려들어 오고, 시간이 흘러 18시 30분이 되자
결국 인민군 보전 협동 부대에 의해 송우리 좌우의 2개 대대의 진지가 붕괴되고,
2개 대대는 분산되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각 대대장이 철수 명령을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철수 후 재집결 지점은 역시 의정부였습니다.

이리하여 제3연대는 결국 송우리에서 별다른 항전을 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지요.
일부 참전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 현장에서 목격한 인민군 차량이 150대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제 동두천, 포천 지역 전투의 정리, 평가와 함께,
 그 이후의 개괄적인 전투 양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사단장은 전방에 투입되어 있는 경계부대로 하여금
적의 공격을 저지시키도록 하고 ,
사단 주력을 주방어진지에 신속히 투입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만,
당시 의정부에서 훈련 중이던&#160;&#160;2개연대 주력이,
감악산으로부터 천주산을 잇는 주저항선에 투입되기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습니다.
 
또 그 사이에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이 도로를 따라 우회 돌파함으로써
주저항선 전방과 후방에서 혼전이 전개되고 말았지요.
결국 인민군 제3사단은 개전일인 25일 오전 중에 포천을 점령하고,
역시 인민군 제4사단은 이날 해질 무렵 동두천 시내에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개전 당일인 6월 25일에, 동두천과 포천을 인민군에게 피탈당함으로써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위태롭게 되었고,
육군 지휘부는 엄중한 전황 때문에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의정부의 위기는 곧 서울의 위기와 직결되므로, 육군 지휘부는 서울 부근에 주둔한 부대뿐만 아니라
후방에 있는 부대들을 의정부 지역에 투입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뭐 당연한 수순이지요.

이에 따라 대전의 제2사단, 대구의 제3사단, 광주의 제5사단에 황급히 출동 명령을 하달했지요.
그러나 당시 상황이 너무도 긴박했기 때문에 이들 부대들은
부대 편성을 완전하게 하지도 못한 채&#160;&#160;대대 단위로 각각 급박하게 출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한 후에도 각각의 단위부대들은
후속하는 본대와 합류하지도 못한 채 엉겁결에 전선에 투입 배치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부대들이 애초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160;&#160;
그런 상태에서 육군 총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에게
동두천과 포천을 공격해서 탈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제7사단장은 개전 이틀째인 26일 아침에 역습을 감행한 결과,
방심한 적을 기습하게 되어 뜻밖에 동두천을 탈환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반대로 제2사단의 포천 탈환 공격은 실패했고,
그로 인해&#160;&#160;동두천에 진입한 제7사단 예하 부대들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동두천을 탈환했던 부대들은 결국 다시 분산 후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다시 적의 강력한 공세 국면에 노출된 국군은 부대 궤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전황의 급박함을 인지한 육군 지휘부에서&#160;&#160;제2사단과 수도사단의 병력 일부를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방어전술을 구사했으나, 결국 대규모 병력 손실을 입고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곧바로 6월 26일에 의정부를 함락당하고,
국군은 오늘날 강북구 창동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곳도 순식간에 돌파당하고,
바로 이어진 미아리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서울을 점령당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 국군 병력들은 뿔뿔히 한강을 도하해서 남으로 퇴각했지요


사실 이 동두천, 포천—의장부 방어 전투에서
육군 지휘부는 그 유명한 <축차 투입을 통한 종심 방어전술>을 구사했습니다만,
결국 국군의 소중한 예비 전력마저 모두 소모해버린 일대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지요.

포천-동두천-의정부 전선이 조기에 무너진 파급 효과는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전 전선에 걸쳐 치명적인 상황을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좌측 인접 부대인 국군 제1사단은 비록 주방어선에서 약간 물러서 있었지만,
여전히 임진강 남안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우측에 있던 제7사단이 무너져서 동측방이 인민군에 노출됨에 따라,
포위 섬멸당할 상황에 직면하여, 할 수 없이 남쪽으로 철수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동부전선의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정신적 충격으로 심각한 작전상의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4. 춘천-홍천 지구 전투 (보병 제6사단)

전쟁 당시 춘천은 38선으로부터 약 12km 정도 떨어진 최전방 도시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중동부전선을 담당했던 국군 제6사단은 지휘소를 춘천에 두고,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 예비로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온 인민군 제2군단은,
예하 제2사단은 화천에서 춘천 방향으로,
제12사단은 인제에서 홍천 방향으로 각각 공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춘천, 홍천지역 전투의 주 전장은 주로 춘천 정면과 홍천 동북방, 두 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6월 25일 04시부터 인남리 및 지암리 일원에 빗발처럼 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포격은 유례없을 정도로 극렬했는데 대략 1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마침 이날은 밤부터 계속 가랑비가 내렸고, 안개가 자욱했는데,
<공격준비사격>이 끝나자, 그 새벽에 인민군 제2군단의 주요 병력이,
추전리, 청평, 고탄리, 인남리, 지암리의 각 도로를 따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a. 제7연대 전투 상황

화천과 춘천을 잇는 도로상의 모진교는 거의 38도선상에 있었는데,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북한강을 건너 춘천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교량이었지요.

그러나 개전과 거의 동시에 인민군에게 피탈당해,
원래의 작계대로 모진교 폭파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실패한 제7연대는
인민군의 공세 초기에 이미 다리를 건너온 SU-76 자주포의 위세에 밀려
전방 방어선이 곧바로 무너졌으며, 급히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7연대는 다행히 조기에 부대를 수습하고, 신속하고 질서있는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적의 기습에 의해 초전에 전열이 흐트러지더라도,
지휘 계통을 유지하고 부대를 장악해서 다음 전투에 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부 전선의 상황과는 다소 다른 양상이었지요.

이 때, 연대 대전차포 중대의 소대장 심일 소위는
편제 화기인 57mm 대전차포 두문을 가지고 매복하고 있다가,
정면에서 인민군 전차(사실은 SU-76 자주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를 공격하지만
효과를 보지못하고 일차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부대원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 본인이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대전차 특공조를 조직해서, 다시 전차 기동로에 투입하여,
모퉁이에서 은닉하고 있다가 커브를 돌아나오는 인민군 자주포 SU-76의 측면을 공격해 정지시킨 후,
특공조원들이 선두 자주포 2~3문을 드디어 파괴시키자&#160;&#160;
인민군 자주포 대열은 길이 좁은데다 잔해들 때문에 결국 퇴각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인민군 진격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이때 사실 인민군 SU-76 자주포는 보병을 동반하지 않고 진격했기 때문에 피격당한 것이지요.

연대 대전차 특공조가 인민군 자주포 2문을 파괴하자
비로소 연대 장사병들은 사기가 크게 앙양되고,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뒤 여러 전투에서 국군은 인민군의 자주포를 노획하기도 했지만,
이 장비를 운용할 능력이 없어서 노획된 자주포를 모두 파괴시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개전 당일 온종일 인민군은 논 밭 등의 개활지를 통해&#160;&#160;완전 노출된 채로 정면공격을 반복했습니다.
이에 맞서 제6사단 제16포병대대가 인민군을 향해 정확하고도 치열한 포격을 가했으므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인민군은 결국 주어진 시간 안에 소양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6월 26일, 전날 저녁(19시)에 실시한 국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고
옥산포 일대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제7연대장은 제19연대 2대대가 우두산으로 증원 오자, 이에 힘을 얻고,
옥산포에 주둔 중인 인민군을 격멸하기로 결정하고,
제1대대에게 08시를 기해 공격토록 명령하고, 다만, 신중히 돌격하도록 하고,
약진 한계선을 적절히 통제하도록 하였습니다.

6월 28~29일은 원창고개에서 국군 6사단 제7연대와
인민군 2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렸는데,
이 때, 인민군의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했습니다.

원래는 인민군이 보병, 포병, 전차부대를 협동하여 국군 제7연대를
원창고개에서 포위 섬멸하기 위해서 진격하다가 벌어진 전투인데,
제7연대의 연대장을 포함한 각급 지휘관들은 포위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단장의 원창 고개 사수 명령을 엄수하기 위해,
원창 고개의 지형적 유리함을 이용해서 치열한 근접 사격전을 전개하고,
심지어 백병전을 치루면서 파상 공격을 감행한 인민군에게 파멸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때 파상 공격은 말그대로 파상 공격입니다.
1파부터 5파, 6파까지 앞에 전열이 무너지면 곧바로 뒷 대열이 앞으로 나오고 하는
그런 무식하고, 방어하는 측에서 보면 기가 질리는 그런 전통적인 보병 공격 전술이었지요.

이 전투에서, 돌격하던 인민군들이 피탄, 피격되어 나가 떨어지면서 지르던 비명 소리가
산천초목을 울리고 하늘을 찔렀다고 하는 당시 참전 군인들의 회고가 있었습니다.
결국 돌격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국군도 반격할 의사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하던 인민군은 돈좌(頓挫)되어, 서로 원거리에서 사격전만 게속하는 양상이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지휘부의 지침에 따라,
원창고개에서 인민군과 대적하던 제7연대 2대대는 철수하여 사현에 있는 연대 주력에 합류하고,
연대장은 사단의 지침에 따라,
화양강 남안으로 철수해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제2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원주 외곽의 주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 원주 일원의 급편 방어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b. 제2연대 전투 상황

개전 당일, 홍천 북방 국군 제2연대 정면에는 인민군 제12사단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습니다.
연대장은 주방어진지에 주력을 배치하고 대전차특공조를 편성해&#160;&#160;인민군의 자주포 파괴를 시도했습니다.
 
다음날인 6월 26일, 춘천 정면에서는 아침부터 소양강을 넘어 남하하려는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숨길 곳이 없는 개활지에서 정면공격을 강행했고,
이에 국군 포병은 정확하고 통렬한 포격으로 타격을 가했습니다.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인민군 제2군단장은 홍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제 12사단의 일부를 춘천 방향으로 전환 배치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인민군은 소양강을 목표한 시간 내에 넘지 못했습니다.
&#160;&#160;
27일에도 북한군은 공격을 계속하면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습니다.
아군은 대전차포와 곡사포로 대응했는데 그 과정에서 소양강은 사살된 북한군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당시 중앙의 육군 지휘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초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한동안 두절되었던 사단과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소통되면서,
육군 지휘부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서부 전선 붕괴와 육군 지휘부의 시흥으로의 철수를 통보받고,
보병 제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의거,
중앙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라. 는 명령이었지요.
 
비로소 인접 부대의 전투상황과 지휘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사단장은 철수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춘천 및 홍천 일대에서 3일 동안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던 국군 제6사단은
6월 28일부터는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원주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그 뒤 계속 전선이 남쪽으로 밀려남에 따라, 충주 등의 태백산맥 중앙부를 거치면서 남으로 후퇴했습니다.


 이제 이 춘천-홍천 지구 전투의 결과를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국군 보병 제6사단은 5일간에 걸친 춘천 및 홍천 동북 지구의 전투와
그 뒤의 4일간에 걸친 지연전을 통해서
인민군 제2군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때, 춘천, 홍천 공격에 실제로 참가한 인민군 제2군단 병력이 24,000명이었는데,
40% 이상의 병력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국군 제6사단이 서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인민군 제2군단의 조잡한 공격전술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이 방면의 인민군은 이상하게도 고지대를 이용한 우회전술 등의 유연한 작전을 사용하지 않고,
개활지나 도로를 통한 정면 돌파만을 고집해서,
결과적으로 국군 포병에게 어이없게도 아주 수월하게 노출되었고
국군 포병의 집중 타격으로 심대한 손실을 입었던 것이지요.

국군 제6사단의 선전 결과, 인민군은 6월 27일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춘천 시내에 진입했기 때문에,
개전 당시의 소위 '인민해방전쟁 제1단계' 작전의 목표 달성이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인민군 총참모부는 제2군단장과 참모장,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강등, 해임하면서
강력한 문책을 실시했습니다. 전쟁 중인데도 장수를 바꾼 것이지요.
인민군으로서는 정말 뼈아픈 실패였습니다.





5. 강릉 전투 (보병 제8사단)

동해안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8사단은 예하의 2개연대 중에서
제10연대를 38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는 예비로 삼척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인민군이 남침할 경우, 사단은 38선상에서 적을 격멸하고&#160;&#160;강릉을 고수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월 중순에 이미&#160;&#160;게릴라 토벌작전을 위해 각 연대에서 1개대대씩을 차출했기 때문에
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가용 병력은 4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지요.
 
반면 인민군 공격부대는 제5사단과 38경비 제1여단으로 그 규모가 국군 방어부대의 2배가 넘었습니다.
여기에 인민군 제549부대 및 제766부대(특수전 부대입니다)가 정동진, 임원진 등 해안으로 상륙해
후방으로부터 협공했으므로 제8사단은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10연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밀려났습니다.
사단장은 전방진지가 순식간에 돌파되고, 후방 해안지역에 적이 대거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자
육본에 증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육군 지휘부의 답변은
서울 방어가 위급한 지경이므로 지원이 불가하다.는 것이었지요.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사단장은 전방(38선)에서 철수한 제10연대와 함께
삼척의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강릉을 방어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인민군 제549부대(특수부대)가 7번도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21연대는 7번도로를 포기하고&#160;&#160;내륙 산악도로를 이용해 사단의 주력과 어렵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사단장은 적정과 가용병력 및 지형을 고려해&#160;&#160;무모한 전투를 회피하기로 하고
6월27일에&#160;&#160;대관령을 넘어 철수했습니다.
대관령 서쪽 유천리 및 횡계리 일대에서 부대를 수습한 사단장은&#160;&#160;사단의 전투력이 건재하며
장병들의 투지가 불타고 있음을 확인하고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격 각 제대가 강릉을 향해 진출하고 있을 때,
육군 지휘부에서 명령이 하달되기를&#160;&#160;'원주로 철수하라’ 는 것이었지요.
결국 사단은 공격을 멈추고 다시 대관령을 넘어 원주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상황은 기억의 분량이 너무 적어서 할 수 없이&#160;&#160;생략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사실 이 글의 결론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위의 각 지역의 전투상보를 요약한 말미에 간단한 평가를 달아 놓았습니다.
사실은 그게 결론이라면 결론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만, 특별히 언급드릴 것이 있다면,
국군 보병 제6사단의 초전에서의 성공적인 방어 작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국군의 전력이 비록 인민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아예 방어 자체가 불가능한 정도는 분명히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부 전선에서 비교적 완강한 방어 작전을 수행한
보병 제1사단의 경우에도 역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국군은 개전과 동시에 발휘된 인민군의 공세에
거의 제대로된 방어전술을 구사하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경원 축선에서의 패퇴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사실 한국 전쟁의 최대 미스테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다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국군은 남북간의 정치적 긴장 국면과
수시로 탐지되는 북한의 전쟁 준비 정보를 바탕으로
6월 하순에 계속해서 <비상경계령>을 발령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6월 24일 자정을 기해서 해제하고,
다음날 전 장병에게 휴가, 외출, 외박을 실시했다는 점이지요.

또, 6월 24일 저녁에 육군 장교클럽(국방회관이라고도 합니다) 낙성식에
육본에서 전후방 고급 장교에게 참석을 종용하는 초청장을 발송하고,
이에 응한 상당수 군 고급 장교들이 6월 25일 새벽까지 술 쳐먹고, 댄스 파티를 벌렸답니다.
이렇게 술 취해서 해롱대는 지휘관들이 그날 새벽에 벌어진 전쟁에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상당히 무리였다는 것이지요.

약간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또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실 전쟁 직전인 6월 10일에 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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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0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4:03

읽는 분들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RCT훈련은 (Regiment Combat Traning : 연대 전투단 훈련)의 약자입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병 제1사단에 복무하던 25년 전에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연대는 전투단입니다. 모든 연대는 고유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소속이 바뀌어도 이 연대 번호는 바뀌지 않습니다.
RCT는 연대장의 재임기간중 1회 실시되며 연대장의 지휘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훈련입니다.
대략 4박 5일 정도 소요되며, 그 훈련을 준비하는 연습 기간도 근 한 달에 이릅니다.
전방 보병 부대의 경우 이 훈련이 가장 강도가 높은 전술기동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무 기간 중 재수 없으면 2번 걸리는 경우도 있지요.
이 경우에는 그야말로 애로사항 꽃피는 군 생활 되겠습니다.
저는 31개월의 복무 기간 중, 이 RCT를 두 번 받았습니다.

다만, 이 훈련의 주요 순서와 경로를 이해하면,
자기가 속한 사단과 연대의 기본적인 작전 개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훈련은 최전방 보병 사단의 경우,
방책선이나 GP에 투입되지 않는 시기에 연대가 하는 훈련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제1사단 제12연대의 RCT 상황을 개략적으로 소개합니다.

4박5일 동안의 훈련 기간에 약 200km 내외를 움직이지요.
일반 8주에 걸친 전반기(여름) 종합훈련이나 4주에 걸친 후반기 종합훈련(겨울)의 끝에도
행군이 있습니다만, 이 RCT 훈련 기간에 행하는 행군은 전혀 그 양상이 다릅니다.

처음에 3.25 비상이 걸리고, 곧이어 5027 비상이 발령되면,
주둔지의 물자 분류를 시행하고, 군장을 결속한 다음, 치장 장비 및 탄약을 수령한 후,
신속히 대대 소산지역으로 이동, 은신하면서
적의 공격 준비 사격에 대비하고, 공중 공격에도 대응하면서,
또 적 비정규전 부대에도 주어진 작계에 따라 적절히 대비합니다.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주변 전황이 파악되면,
주둔지의 3~4km 후방에 있는 대대 집결지로 이동, 부대 재편성에 임합니다.
그리고 상급 부대에서 하달된 명령에 따라,
대대 주방어진지로 이동하여 그곳에 투입되고 주간방어, 야간방어에 들어갑니다.
주야간 방어 기간에 대항군이 투입되어 각종 상황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전투 훈련이 실감나게 계속 이어집니다.

(물론 이 훈련의 전 기간에 걸쳐 군단에서 나온 훈련 통제관들이
전체 훈련을 감시, 감독하지요.)

때로는 주방어진지에서의 고수방어에 실패하서
다시 후퇴하고(도피 및 탈출) 최후 저지선으로 이동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주야간 방어가 끝나는 다음날 새벽에 여명 공격에 나서고,
곧이어 주간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이 주간 공격 기간에도 여러가지 훈련 상황이 주어지고,
아주 슬픈 땅개의 고난이 그 정점에 달하게 되지요.
 
주간 공격 끝에  돌격하여 적 진지를 돌파하고 적을 격멸하여 승리를 쟁취한 후,
다시 방어에 임하면서 부대 재편성을 하고, 훈련을 마치게 됩니다.
훈련을 마치면 주둔지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 훈련 기간에 대략 200km 내외를 행군하게 됩니다만,
이때의 행군은 보통의 훈련시 행군과는 다르게, 항상 접적 이동 상태이기 때문에
휴식 시간이 따로 없을 뿐더러, 적 게릴라 출현, 화생방 공격 상황, 적 포탄 공격 등의
각종 상황이 주어지기 때문에 때로는 방독면을 쓰고 수 km씩 뛰기도 하고,
급속행군으로 10km 이상을 휴식없이 움직이기도 하는 아주 힘든 행군이지요.
한 마디로 좆뺑이 치는 거지요 뭐.

music님의 댓글

헛.. 이 방대한 글을..직접 쓰신거에요?
일단 캡쳐하고... 나중에 읽어야겠군요..

홍똘님의 댓글

저는 UDT 출신이라서 도대체가 뭔 말인지 이해조차 힘들다는~ 흐흐흐~

ⓧ내숭님의 댓글

음... 잘 보았습니다.

생소한 용어들과 지형과 지역에 대한 사전지식이 많지 않아
글씨만 쭉~ 읽었네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14

읽어내기가 힘드신 분들은 맨 뒤의 결론 부분만 보셔도 됩니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중간중간에 엄청 막히더군요.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웬걸......중간 중간이 가닥가닥 끊어져서 이을 방법이 없더라구요.

제1사단 관련 전투상보야 뭐 여전히 생생했습니다만,
제7사단 관련 내용 중에서 특히 상당부분이 막히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도도 찾아보고, 관련 문건도 다소 탐색해서 기억을 보충해야만 되었지요.

사실 이 계통의 문건들은 대부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인가 하는 곳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베낀 것들 뿐이라, 내용이 대동소이합니다.

제가 군 복무 시절에 읽었던, (당시는 아주 소중한 책으로 여겼던) 야전 교범 중에 있던 그 책도
사실은 알고보면 국방부 편찬 한국전쟁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더군요.

그러니까 혹시 이 주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은 분들은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구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물론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아마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박명림 선생이 지으신 한국전쟁사 관련 책도 상당히 평이 좋더군요.
저는 이 책을 먼저 구해서 시간을 내어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있지요.

안산사랑님의 댓글

쎈자님의 뛰어난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저도84~86년도에 강원도 최전방 근무를 했었는데 RCT를 3박4일 했는지 4박5일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19

그건 사실 저도 안산사랑님과 같습니다. 3박4일인지 4박5일인지 헛갈리지요.
그냥 요즘 만나는 다른 군 동기놈들이 4박5일이라고 해서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 최전방에 근무하셨다면, 또 육군이셨다면,
제6사단, 제7사단, 제15사단 중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동쪽에 또다른 부대가 더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안산사랑님! 군 경력을 이 기회에 좀 밝혀주시지요.

홍똘님의 댓글

한국전쟁 초반인 1950년 6얼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서울에서 지체한 상황이 미스테리여서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밝혀내려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후 남한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한강을 넘는 도하장비가 부족했다,
도하를 저지한 결정적인 전투가 있었다는 이론들이 나왔었습니다.
군사관계자들이 도하장비의 부족과 결정적인 전투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전투가 춘천전투였으며 주역이 한국군 제6사단이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쎈자님 글을 읽어보니 6사단이 대단했던 모양이네여~

music님의 댓글

흐.. 화천 7사단에서 근무한 저는 아주 재미있게 (?)... 사실 진짜 무슨 전쟁게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

7사에 3,5,8연대가 예하인데... 당시는 아니었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30

이크! 홍똘님도 알고보니 한국전쟁에 대한 소양을 상당히 갖고 계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music님! 흐흐
보병 제7사단은 창군이래 우리나라 육군 역사에
길이 기억되는 최대의 참혹한 패배를 당한 부대로 알려져 있지요.

위에 제 글에도 있듯이 동두천, 포천 전투에서 부대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를 정도로
처참하게 붕괴되었고, 사단 전체가 재생 불능상태에 빠져 버렸지요.

예하의 주력 연대들은 뭐 다 소실되어서 그 후에 다시 편성되는 과정에서
거의 새로 창설되는 수준의 정비를 거쳤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예전에 듣기로는
평양의 인민해방전쟁 기념관에 자랑스러운 노획물로
국군 보병 제7사단기가 전시되어 있답니다. ㅎㅎㅎ

사실 6.25 전쟁 얘기만 나오면 이 칠성부대는 영 자세가 안나오지요. ㅎㅎㅎㅎ

제가 사실은 80년대 초반에 7사단 최전방 방책선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상황이 열악하더군요.
그 가파른 소대 초소까지 병사들이 물지게를 지고서 물을 길어 먹고,
방책선 초소로 투입되는 통로는 왜 그리 험하던지.....
정말 힘들게 군 생활하는 칠성부대 병사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짱아&앙크&달망님의 댓글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참 몰두해서 읽고있는데 일들어와서
짜증 제대로 났네요
센자님 참 대단하십니다^^..

안산사랑님의 댓글

15사단 26대대 C포대 근무를 했고요.
그당시 막 부임하셨던 대대장님이 현재 김태영 합창의장입니다.
부하들이 상당히 존경하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포대관측병이라 GP,OP근무도 해봤고 보병지원 훈련에 많이 따라다녀 봤습니다.
대성산,적근산일대에서 근무햇습니다.
84년 태풍 "베라"던가..때는 가물가물~~~
보급로가 모두 끊겨서 정말 밥한덩이에 깍두기3개, 멀건배추국으로 연명(?)하며 하루종일 마대자루에 흙퍼서 도로복구 작업도 했고 배가 너무고파 (제가 다른사람보다 좀 많이먹는 편입니다.)쓰레기통에서 빵을 주워 눈물을 흘리며 먹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합니다.
그때 고생을 같이했던 동기들 얼굴본지가 벌써 20여년이 되었네요.
쎈자님은 그때 동기들과 여태 만나시는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43

예! 저는 군 동기 2명과 아직도 가끔 만나고 있지요.
둘 다 제 고참인데 나이는 제가 2살 더 많아서,
군대시절에도 저한테 고참 대우를 못받던 사람들이지요.

대성산, 적근산은 중동부 전선에서 험하기로 손꼽히는 지역인데,
정말 고생하셨겠습니다. 그쪽은 아마 포병 생활도 정말 힘들겠더라구요.



지금부터는 위의 홍똘님 댓글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6사단의 승리와 관련해서 사실 좀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초전에 보병 제6사단의 승리는 스스로 잘해서라기 보다는,
위의 제 글에도 언급했듯이,
인민군 제2군단의 정말 안이한 공격 전술이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제 생각에는 타당해 보입니다.

물론 6사단은 서부전선의 부대들과는 달리,
6월 23일부터 전 장사병이 영내 대기 상태에서
위기의식을 갖고 인민군의 동향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답니다.
부대원들의 훈련 상태도 상대적으로 양호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6사단을 잘 꾸려놓은 사람이
알고보면 바로 개전 당시 처참한 패배를 당했던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입니다.
6월 10일경까지 이 사람이 바로 6사단장이었다가,
전쟁 며칠전에 제7사단장으로 부입했던 것이지요.
정말 재수없는 군인입니다.

사실 제6사단의 서전에서의 승리는 그 사단장의 공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알고 보면, 제19연대장 임부택 중령의 지휘 능력의 결과라고 하는
당시 그 부대에서 종군했던 많은 참전 용사들의 증언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단장은 오히려 약간 무개념했다는 비판도 접한 적이 있지요.

music님의 댓글

아..이거 정말 잘못알고 있었네요? ;;ㅎㅎ
전 7사단이 평양진격을 제일 먼저 선봉에서 했다고... 들었는데...
망하기도 제일먼저... 진격도 제일 먼저...이걸까요..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56

이크! 댓글다는 도중에 오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평양의 '인민해방전쟁 기념관'이 아니라
그게 정확한 명칭이 아마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인가 그런 것 같은데......
사실 이것도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5:59

평양 수복 전투를 통해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한 국군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보병 제1사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이 북으로 올라가자 당시 서부 전선의 한국군 부대들은
유엔과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8선을 조기 돌파하고자 갖은 수를 다 썼지요.
그리고 미군보다 평양에 먼저 입성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주야로 달려서 평양 입성을 달성하고자 노력했지요.

이 관련 사항은 한 번 알아보시면 금방 확인이 됩니다 사실.

홍똘님의 댓글

한국전쟁에 관해 읽어본 책은 80년대 중반에 읽었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거의 유일합니다.
최근에 와서야 박태균의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태균의 책에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머문 이유는?"이라는 단원이 있는데,
그걸 읽고 인터넷에서 여러 자료들을 검색해봤더니 춘천전투, 제6사단 이런 정보들이 나왔습니다.
'상당한 소양'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멉니다~

고니님의 댓글

휴우~~~~....

저도 키핑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네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6:19

음.....역시 홍똘님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으셨군요.
그것도 아주 이른 시기에 읽으셨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지 못했지요. 사실 저는 <태백산맥>도 읽지 않았지요......

사실 최근에 한국전쟁과 관련한 최대의 문건이 공개되어 관련 연구자들의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바로 '라주바예프 보고서'이지요.
이 라주바예프라는 사람은 소련군 장성인데,
6.25 전쟁 시기에 북한에 군사 고문으로 들어와 있으면서,
사실상 인민군 전체를 지도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정보들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작성한 문건이 바로 '라주바예프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의 자료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에,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한국 전쟁의 전후 과정이나 구체적인 전투 과정에 대한
새로운 내용들이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90년 이후, 한국 전쟁과 관련한 구 소련 내부의
여러 문건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전쟁에 대한 기존의 정보에만 의존하던 이론들이 상당히 도전받고 있습니다.

흐루시쵸프 회고록을 비롯한 6.25 전쟁 당시 소련 고위 지도층들이 저술한
저작물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1990년 이후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2 17:12

6.25 전쟁 개전 당시 국군과 인민군 주요 간부의 이름과 출신 명단입니다.
참고하시면 재미있지요. 특징을 발견해 보시지요.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 (동북연군, 갑산파)

전선사령관 김책 (동북연군, 갑산파)

1군단장 김웅 (팔로군)
 부군단장 김재욱 ( ? )
 참모장 유신 (팔로군)
 
 
1사단장 최광 (동북연군, 갑산파)
 2연대장 김양춘 ( ? )
 3연대장 이창권 ( ? )
 14연대장 황석 (팔로군)
 포병연대장 현학봉 ( ? )
 
 
3사단장 이영호 (동북연군, 갑산파)
 참모장 장평산 (중공군)
 7연대장 김창봉 (동북연군, 갑산파, 훗날 60년대 민족보위상)
 8연대장 김병종 ( ? )
 9연대장 김만익 ( ? )
 포병연대장 (성명 미상)
 
 
4사단장 이권무(중공군)
 참모장 (성명 미상)
 5연대장 최인덕  ?
 16연대장 박승희  ?
 18연대장 장교덕 (팔로군)
 포병연대장 (성명 미상)
 
 
6사단장 방호산 (팔로군)
 참모장 (성명 미상)
 1연대장 김후진 (팔로군)
 13연대장 한일해 (팔로군)
 15연대장 조관 (팔로군)
 포병연대장 이민  (팔로군)
 
 
105전차여단장 류경수 (동북연군, 갑산파)
 107전차연대장 최우식 (소련군)
 109전차연대장 김태련 (소련군)
 203전차연대장 최율석 (소련군)

3경비여단장 최현 (동북연군, 갑산파) 
 
13사단장 최용건 (동북연군, 갑산파, 김일성의 충실한 선배) 
15사단장 박성철 (동북연군, 갑산파, 훗날 노동당 비서) 
 
 
2군단장 김광협 (동북연군, 갑산파) ➞ 김무정 (팔로군)
 
2사단장 이청송 (소련군)
 참모장 현파 (중공군)
 4연대장 이성호 (중공군)
 6연대장 전병갑 ( ? )
 17연대장 전문섭 (동북연군, 갑산파)
 포병연대장 안격호 ( ? )
 
 
5사단장 김창덕 (팔로군)
 참모장  조관 (팔로군)
 10연대장 박정덕 (팔로군)
 11연대장 김봉문 (팔로군)
 12연대장 왕휘 (팔로군) 
 포병연대장 차균섭 (팔로군)
 
12사단장 전우 (팔로군) 
 참모장  지병학 (팔로군) 
 30연대장 최학훈 (팔로군) 
 31연대장 이원성 (팔로군) 
 32연대장 황동화 (팔로군)
 포병연대장 손응삼 (팔로군) 
 
1경비여단장 오백룡 (동북연군, 갑산파)
766부대장 오진우 (동북연군, 갑산파, 훗날 인민무력부장)


   <국군>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 (일본 육사, 소좌)
육군 사관학교장 이준식 (중국군, 대령)
육군 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 (중국군, 소장)
육군 보병학교장 민기식 대령 (일본 학병, 소위)
육군 포병학교장 신응균 대령 (일본 육사, 소좌)

1사단장 백선엽 대령 (만주군, 대위)
 11연대장 최공록 대령 (일본군, 지원병)
 12연대장 전성호 대령 (중국 동북의용군 소장?)
 13연대장 김익렬 대령 (일본군 학병, 소위)

7사단장 유재흥 준장 (일본육사, 소좌)
 1연대장 함준호 대령 (일본군 학병, 소위)
 9연대장 윤춘근 대령 (만주군, 대위)

6사단장 김종오 대령 (일본군 학병, 소위)
 2연대장 함병선 중령 (일본군 지원병, 준위)
 7연대장 임부택 중령 (일본군 지원병, 준위)
 19연대장 민병권 대령 (일본군 학병, 소위)

8사단장 이성가 대령(중국군, 소령)
 10연대장 고근홍 중령 (일본군 지원병)
 21연대장 강용배 중령 (일본군 학병, 소위)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 (일본육사, 소좌)
 3연대장 이상근 중령 (일본군학병, 소위)
 8연대장 서종철 중령 (일본군학병, 소위)
 18연대장 임충식 중령 (만주군, 준위)
 
 
2사단장 이형근 준장 (일본육사, 소좌)
 5연대장 백남권 중령 (일본군 학병, 소위)
 5연대장대리 박기성 중령 (중국군, 중령)
 16연대장 문용채 중령 (만주군, 대위)
 
 
3사단장 유승열 대령 (일본육사, 대좌)
 22연대장 강태민 중령 (만주군, 대위)
 23연대장 김종원 중령 (일본군 지원병)
 
 
5사단장 이응준 소장 (일본육사, 대좌)
 15연대장 최영희 중령 (일본군 학병, 소위)
 20연대장 박기병 중령 (일본군 지원병) 
 
 
독립 17연대장 백인엽 대령 (일본군 학병)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 (일본군 학병, 소위)

홍똘님의 댓글

인민군 지휘자들은 대부분 항일연군 출신, 국국 지휘자들은 일본군 출신.
학병 출신들이야 점수 좀 쳐주겠지만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은 좀~
식민지에서 해방되어봤자 이 정도면 말짱 도루묵......

music님의 댓글

아.. 진짜.. 저 장교들 구성을 보니...
나같아도 인민군에 가고 싶었을것 같네요..

내가 근무했던 7사단장이 일본육사출신이었다니...
칠성부대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3 01:21

음.....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은 아닙니다만,
그게.....아마도 위의 명단 중에서 3사단장 유승렬 대령이 유재흥 준장의
아버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건 확인을 좀 해봐야 될텐데......


위의 명단에서 특기할 만한 인물 한 명에 대해서 잠깜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로 김책(金策)이라는 인물이지요.
이 인물은 사실 전쟁 초기인 1951년 초에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인물이 북한 정권과 사회에 끼친 영향이 실로 다대합니다.

김일성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계, 또는 모택동과 유소기, 주은래의 관계,
호지명과 레두안, 팜반동, 보 구엔 지압의 관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관계
뭐 이런 식으로 비교해 볼 수도 있는 정도의 인물이지요.

이 사람은 김일성과 그야말로 복심을 나누는 진정한 동지 관계입니다.
일찌기 1920년대부터 반제국주의 단체 활동을 했고,
일제 치하에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형생활도 했지요.
김일성이 1930년대 초반부터 남만주, 동만주 일대에서
소위 항일 유격대 활동을 하던 시기에 합류하여 비로소 동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중 선전과 조직 사업에 탁월한 역량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막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북조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으며,
바로 중요한 것은 '민족보위국장'이라는 의미심장한 기관의 수장이었습니다.
정권 수립 이후에는 부수상이 되었지요. 물론 수상은 김일성이었습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해방 후 북한 지역의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민족 우파 진영을 치밀한 정치 공작으로 분쇄하고 무력화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 40년대 초에는 항일 유격대 활동을 통해서
탁월한 군사 지휘관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전 우리 선친으로부터 이 인물에 대한 평을 듣기를 '희대의 책략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름도 책(策)이지 않습니까? ㅎㅎ
40년대 좌익 활동을 하던 활동가들에게도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었지요.
거의 김일성과 버금가는 평판을 누리는 정도의 인물로 말입니다.

이 사람이 한국 전쟁 시기에 전선사령관을 지냈습니다만,
원래 전선사령관이라는 직책은 편제상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임시직으로
전쟁 전 국면을 후방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음.....그게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하고 비슷한 역할이지요.

아뭏든 이 인물이 51년 1월에 사망하자, 김일성이 그야말로 온 몸으로 통곡하고 비탄에 잠겼답니다.
근거가 있느냐 물으시면, ...... 당연히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요.

원래 자력갱생의 북한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공업, 그중에서도 전력 산업과 철강 공업입니다.
그중 일제 시대에 건립한 성진 제철소는 무산 광산의 풍부한 철광석을 원료로 사용해서 철을 생산하는,
건립 당시에는 동양 굴지의 단일 제철소였다고 합니다.
이 제철소는 해방 이후 북한의 핵심적인 공업기지가 되었는데,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이 제철소를, 김책을 기려서, 김책제철소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도시의 이름도 성진에서 김책으로 바꾸었고요.
이 김책제철소는 명실상부한 북한 최대의 공업기지이며, 현재의 명칭은 <김책제철연합기업소>입니다.
연합기업소는 북한에서 규정하는 최고 단위의 복합 기업 집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평양에 있는 북한 최고 교육기관인 김일성 대학의 공학부를 분리하여 <김책공업대학>으로 만들었습니다.
북한 최고의 이공계 인재가 모이는, 또 북한 최고 정권기관의 핵심 간부도 양성되는 그런 곳이지오.
마치 중국의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김일성 일가를 제외하고 이와 같이 특정 행정 구역에 개인의 이름을 붙인 경우는 거의 없지요.
(예를 들면 김형직 사범학교, 강반석 혁명유자녀학원, 김정숙 군 등등........)
또 북한 최고 교육 기관에 김일성 일가를 제외하고 그 이름이 들어가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김책이 사실상 유일하지요.
그러니 김일성이 김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편 개전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강건도 50년 가을에 전사했는데,
이 인물의 이름을 따서 조선인민군 기간 간부 양성기관인 제1군관학교를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칭했지요.
남한의 사관학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강건은 이것 뿐이지요.
원래 강건 이사람은 남한의 경북 상주인가가 고향인데,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해서 거기서 성장했답니다.

이상입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3 01:30

참!.... 그리고 또 하나의 미확인 소문을 알려드립니다.
이건 제가 어릴 때부터 듣던 얘기입니다만,

위에 국군 제6사단에 의해서 큰 패배를 겪고 곧바로 강등 면직된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이라는 인물 말입니다.

이 사람이 예전에 듣기에는 김일성의 2번째 부인이었던
김성애의 오빠라는 유력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뒤 이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좀 알아봤습니다만, 영 확인이 어렵더군요.

music님의 댓글

아.. 정말 흥미롭네요.. 이부분 앞으로도 연재를 부탁드릴께요..
근현대사에 대해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가람가솔님의 댓글

일단, 기네요...... ㅡ,.ㅡ;;
읽다가 잠깐 졸았다는...
제가 6사단에서 근무해서 조금은 익숙한 내용이네요.
뭐, 물론 ssenja님처럼 상세한 지식은 전무합니다.
아뭏던 정훈교육 받으면서 내가 싸운 것도 아닌데
괜시리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nara님의 댓글

6,25때 깃발을 뺏긴 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부대는 아직까지 깃발이 없는 부대로 남아있는데 그게 7사단이로군요.
군인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게 부대깃발을 적군에게 뺏기는 것인데..
어여 깃발을 돌려받는 날이 빨리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3 23:56

이제 읽을 사람들은 다 읽었지 싶었는데, 가람가솔님과 nara님이 오셨군요.

nara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오래 전부터 민간에 전승되는 것입니다만,
제가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단 깃발은 항상 CP에서 사단장 위치의 뒤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사실 그래봐야 소모품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게 사실 ...... 없어지면 다시 만들면 그뿐입니다 .


음!..... 가람가솔님이 청성부대 출신이군요.....
정훈교육 말씀을 하셨는데,
그 교육의 대부분의 내용은 아무래도 보병 제6사단이 한국전쟁 기간에 이루어냈던
자랑스러운 전과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겠지요?

그런데 농담삼아 묻는 것입니다만,
위에 제가 언급했던 일부 내용들,
그러니까 6사단 트럭이 미8군 사령관 워커를 치어 죽인 얘기나,
49년의 대량 월북 사건 같은 것은 아마 빼버렸겠지요?

사실 그런 정훈교육에 딱 맞는 소재가 따로 있었습니다만,
제가 위의 내용에서는 빼버렸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홍천 말고개 전투> 이지요.

50년 6월 27일에 홍천 동북방에 있던 말고개에서,
제19연대 대전차특공조(10여 명)가 영웅적인 전투 행동 끝에 인민군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했으며, 인민군 24명을 사살했다는 전설적인 전투가 바로 말고개 전투인데,
이거 6.25 전쟁의 신화 중의 신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규모 부대의 전투는 제가 위의 글을 작성할 때,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파괴된 것은 전차가 아니라 자주포였다고 하더군요.

사실 위의 제 글은 6월 25일~6월 28일 사이에
벌어졌던 주요 전투를 설명하고 있어서,
그 범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보병 제6사단도 6.25 전쟁 기간 동안 참담한 패배를 당한 전투가 물론 있습니다.

그 전투가 뭔가 하면, 바로 51년 4월 21~23일에 있었던<사창리 전투>입니다.
이 사창리는 어디인가 하면, 화천군 사내면 면사무소 일원이고,
전투가 벌어진 곳은 그 근처의 계곡이지요.
그곳에서 보면 정남쪽으로 화악산, 정북쪽으로 대성산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병 제6사단(사단장;장도영)은 미군 제9군단 소속으로 김화(金化) 점령 작전에 나섰는데,
북진 과정에서 사창리를 점령하고 있던 차에, 중공군의 내습 정보를 듣고,
이 근방에 포병대대를 전진 배치시키고,
좌로 19연대를 광덕산-김화에, 우로 2연대를 두류산-김화로 진로를 잡아 기동시키고
사단 예비인 7연대는 양 연대의 중앙인 사창리에 자리잡게 했지요.

이 상태로 계속 전진하는 도중에,
갑자기 좌우의 제19연대와 제2연대로부터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밀려오고 있으며,
이 상태에서 현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급보를 받고,
이에 제27포병대대는 즉각 적 접근 지점에 맹렬한 포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때 포병으로 종군하셨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야말로 포신이 너덜거리도록 사격을 했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중과부적인데다, 해당 지점에 워낙 수목이 우거져
피아식별이 매우 곤란해서 화력의 효과가 반감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중공군이 일제히 산에 불을 놓으니, 포병 관측병들의 관측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지요.

이 때 내습한 중공군은 2개 사단 병력이었고, 산악전에 아주 능한 부대였습니다.
결국 사단장은 두류산-광덕산 지점에서 사단을 수습키로 결정하고,
사단예비인 제7연대를 광덕산 남쪽 사면으로 먼저 투입하고,
20시를 기해 전방의 19연대장, 2연대장에게 두류산-광덕산 지점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제6사단의 전방 2개 연대가 후퇴하는 와중에,
중공군은 해당 지점으로 극렬한 포격을 가해서
결국 제2연대는 두류산 접근을 포기하고 사창리로 후퇴하게 되었지요.
한편, 제19연대는 후퇴하는 제2연대를 따라붙은 적에게 차단되어 분산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먼저 투입되었던 제7연대는 두류산 일대에서 고립되어
사투를 벌이다가 우측방 미군 해병1사단 지역으로 탈출했습니다.

결국 23일 01시경, 사창리 골짜기 일대에는 각기 분산철수한 사단병력들이 밀려들어
일대 혼란이 야기되고 있던 중에, 부대 재편성에 임하고 있었지요.
이를 은밀히 정찰하던 중공군은 불시에 강력한 기습을 단행하고,
이에 보병 제6사단은 남쪽인 화악산 방향으로 철수했으나,
이 과정에서 철수하는 보병 제6사단 병력의 꼬리를 따라붙은 중공군의 공격에
전 부대가 일대 공포의 도가니로 화해서 지리멸렬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포병부대도 대부분의 중화기를 유기하고, 차량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만 2일 간의 전투에서 보병 제6사단은 34km나 남으로 도망갔으며,
25일 경에 겨우 수습된 병력이 6,000명 정도였습니다.
원래 전투 직전에는 12,000명을 넘었던 병력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없어져 버렸지요.

이 <사창리 전투>는 한국전쟁사에 손꼽히는 국군의 패전 중에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마 제6사단 장병을 위한 사단역사 관련 정훈교육에서 이 <사창리 전투>도 다루는 것은 아니지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09.06.24 00:29

그런데 이거 ..... 글 제목에 '블루스타를 기리며' 어쩌구 해놓고,
이제와서 <사창리 전투> 운운하면서
결국엔 청성부대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지? 흐흐흐......

music님의 댓글

사창리..ㅎㅎ;; 지금은 27사단 이기자부대의 본부가 있는 곳이네요.
그곳에서 그런 엄청난 사상자를 낸 패전이 있었군요....
덕분에 많이 알게 됐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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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희 2,534 0 0 2009.12.04
rokgunhead 2,526 0 0 2010.11.09
여백 2,515 0 0 2009.11.03
심심타파열공모드 2,510 0 0 2007.11.19
레벨 WASSEO 2,509 0 0 2022.03.31
다소곳한깜장콩 2,504 0 0 2006.07.30
ssony 2,500 0 0 2008.01.23
제리고고 2,492 0 0 2014.08.28
Devilock 2,488 0 0 2008.09.27
성진홍 2,488 0 0 2007.06.19
김명기 2,483 0 0 2005.05.27
NYdavid 2,482 0 0 2009.06.24
열라면 2,478 0 0 2015.10.28
1988 2,471 0 0 2011.10.12
동성... 2,469 0 0 2008.06.25
이유진 2,468 0 0 2014.08.03
향기 2,466 0 0 2009.09.20
BeoWulf 2,464 0 0 2012.11.09
향기 2,456 0 0 2008.10.05
두쿠 2,451 0 0 2016.06.07
완전초보 2,450 0 0 2009.12.07
용가리 2,449 0 0 2007.11.29
정우덕 2,447 0 0 2005.01.31
냐냐냐 2,443 0 0 2015.01.21
원커넥트 2,443 0 0 2016.06.15
성진홍 2,442 0 0 2014.06.11
김명기 2,438 0 0 2004.07.14
darktem 2,434 0 0 2008.04.08
lethargiy 2,434 0 0 2007.11.20
Bluenote 2,431 0 0 2010.05.21
김명기 2,429 0 0 2005.03.02
향기 2,423 0 0 2009.06.22
성진홍 2,422 0 0 2012.11.24
레벨 보라 2,420 0 0 2019.03.31
열라면 2,418 0 0 2015.10.02
환각토마토 2,416 0 0 2007.08.09
윤선파호 2,413 0 0 2010.12.08
MinJae 2,412 0 0 2008.03.01
임준모 2,410 0 0 2016.05.23
여백 2,405 0 0 2009.11.22
하하하하호호 2,405 0 0 2016.03.17
driemon 2,400 0 0 2013.03.26
솔리드스네이크 2,399 0 0 2013.03.03
오상현 2,397 0 0 2016.06.07
RnSoul 2,393 0 0 2011.03.04
김명기 2,390 0 0 2004.12.16
monami 2,387 0 0 2014.05.18
완전초보 2,382 0 0 2007.05.22
레벨 귀여운anny2325 2,381 0 0 2019.07.09
프린이 2,377 0 0 2007.08.09
동성... 2,377 0 0 2007.09.18
EVA 2,376 0 0 2015.07.21
박승규 2,376 0 0 2005.04.14
향기 2,375 0 0 2012.10.05
EVA 2,369 0 0 2015.02.24
김명기 2,367 0 0 2007.03.08
하하하하호호 2,366 0 0 2015.11.25
향기 2,365 0 0 2005.12.03
여백 2,361 0 0 2008.01.04
NYdavid 2,360 0 0 2007.07.14
여백 2,359 0 0 2008.11.11
김영권 2,358 0 0 2015.02.17
향기 2,355 0 0 2010.07.09
윤희진 2,352 0 0 2018.12.22
향기 2,351 0 0 2015.03.04
멜리 2,350 0 0 2015.04.21
무한초보 2,347 0 0 2009.02.02
구아바 2,342 0 0 2010.01.27
맥피니언 2,341 0 0 2018.01.17
사과장수 2,339 0 0 2008.08.11
종글 2,335 0 0 2006.05.18
김성용 2,330 0 0 2004.08.03
여백 2,328 0 0 2009.12.25
아트호 2,325 0 0 2021.09.15
김영선 2,324 0 0 2006.07.09
여백 2,322 0 0 2007.09.18
뿅뿅이 2,315 0 0 2016.02.19
이원찬 2,313 0 0 2012.04.13
누들리에 2,309 0 0 2008.10.02
Sdesign 2,309 0 0 2013.03.07
고은철 2,309 0 0 2012.12.10
김명기 2,306 0 0 2004.04.19
유성욱 2,299 0 0 2009.01.07
김명기 2,296 0 0 2007.10.30
잿빛하늘 2,296 0 0 2004.12.17
김일환 2,295 0 0 2005.01.21
dsgn레시피 2,295 0 0 2014.08.19
머그컵 2,294 0 0 2011.04.08
짱세 2,288 0 0 2010.06.12
Today 2,285 0 0 2021.03.08
이형재 2,282 0 0 2009.04.27
성진홍 2,281 0 0 2008.10.16
동성... 2,281 0 0 2008.06.01
케이를머거? 2,281 0 0 2008.04.03
이삭의노래 2,277 0 0 2012.04.12
솜사탕 2,273 0 0 2009.05.13
김명기 2,272 0 0 2005.03.07
뱅토벤 2,270 0 0 2010.11.23
야옹이발빠닥 2,270 0 0 2010.05.30
김명기 2,269 0 0 2008.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