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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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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전설

The Temptations 의 느긋한 Since I Lost My Baby 가 좋아하는 채널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5월의 가볍고 따스한 오후, 낡고 자글거리던 L.P.의 흑백시절, 아날로그의 텁텁한 먼지 내음이 나는 노래를 들으며 자꾸만 나른해 집니다.

“아저씨이”
“뭐냐?”
“빨리 말 태워 주세요.”
“그래.”

새벽부터 이런저런 일로 잠을 설쳤더니, 오후엔 눈꺼풀이 무거워 집니다. 잠시 흐르는 음악에 마음을 풀고 자리에 누웠을 때, 근처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인 자매들이 말을 타게 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래 일어나자.’ 등을 끌어안는 침대를 밀치고 아이들의 활짝 핀 반가움으로 다가갑니다.

얼마 전, 안장도 없이 말을 타던 남미의 아이들을 찍은 퓰리처 수상사진이 생각나, 안장을 올리지 않고 말갈기를 잡게 하여 아이들을 태웁니다. 두 자매를 모두 타게 하고 비월이를 잡습니다. 맨발로 말위에 올라탄 아이들은 그동안 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류가 말과 함께한 정당한 인연을 맺습니다.

“와아, 말이 따듯해요. 되게 부드럽네...”

아이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타고 다닌다는,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사실에 그만 감격하고 맙니다. 높으니 무섭니 하는 이야기는 다만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공포를 너무 많이 체험한 사람들만이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기 마련이지요. 성적도 높아야 하고, 실적도 높아야 했던, 개발도상국의 어른으로 살아야했던 시간을 돌아보면 높은 곳에 오르기와 또 높은 곳에서 견디어내기라는 공포에 다름 아니었던 같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또 한 바퀴 돌아 주세요.”

안장도 없는 말에 올라앉은 두 자매가 모두 팬지 같은 미소를 입가에 날리며 봄의 대기 중을 부유합니다. 아이들의 생명력이란 어떻게 각도를 잡아도 다 아름다운 청포도의 싱그러움입니다. 바람이 불자, 아이들의 검고 빛나는 머리카락이 숲 쪽으로 팔랑거립니다. 잠시 동안 아이들과 시간을 거꾸로 감아 들어갑니다. 온통 초록으로 통일한 원시와 대자연 속으로... 잠깐 나 역시 아주 오래된 미소, 그 진 보랏빛 팬지 같던 미소를 떠올립니다.

“여기예요. 여기! 아이 참...”

일부러 못 본 척 차를 교문 앞으로 지나가게 세웁니다. 하늘색 원피스와 발목부분이 끈으로 된 샌들을 신은 당신이 백미러 속에서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잠깐 뛰어오르고 치마를 날리며 뛰어 옵니다. 당신의 눈동자는 빛나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보입니다.

미소 때문에 볼이 조금 부풀어져 보입니다. 검은 생머리를 뒤로 날리며 당신은, 당신의 사랑이라는 단 한 가지 뚜렷하고 단단한 신념을 향해 곧바로 달려옵니다. 당신의 뒤쪽에서는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진초록의 가로수 길이 위 아래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행복이 20미터 앞에서 달려옵니다. 내 사랑이 곧장 다가옵니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마침내 당신은 내 앞에 멈춥니다. 따스한 바람이 당신과 나 사이에 머뭅니다. 나는 그 바람을 마저 품고 당신의 목에 코를 대고 당신의 향기를 빨아들입니다. 봄과 사랑과 거리의 꽃향기. 빨간 고무공을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당신은 두 눈을 내게 고정시키고 두 손을 뒤로 모으고, 뒤로 걸으며 내게서 당신이 없던 시간을 알아내느라 파랑새처럼 재잘거립니다.

“오늘 뭐했어요? 어디에 갔어요? 누구 만났어요? 점심엔 뭘 드셨죠? 전 학교 식당에서 먹었는데 너무 맛없어서 핫도그 하나 더 먹었어요. 그래도 배고파요. 나 맛있는 것 사줄 거죠?”

“이런 한 가지씩 질문해, 한 가지씩. 처음에 뭐였지? 아, 뭘 했냐? 였지?”

아이들에게 물 호스를 열고 시원한 물을 뿜어 줍니다. 세수하고 차가운 물을 받아먹고 하늘로 물줄기를 솟아오르게 만들어 줍니다. 아이들은 새로 만들어진 조그만 무지개다리 속을 ‘캬아 캬아!’ 뛰어 다닙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에너지로 고요하던 서식지가 잠깐 시끌시끌해집니다. 멀리서 다가오던 앞집 강아지는 물줄기가 자신을 향하자, 갑자기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칩니다. 셋이 모두 따스한 햇살 속에서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얘들아 땅콩 먹어라.”
“아저씨는 왜 혼자 살아요?”
“누구와 헤어졌는데 이렇게 시골에까지 왔어요?”
“아유 담배 피지 마세요. 건강에 안 좋아요. 간접흡연이 더 나쁘대요.”
“흠... 애들아, 여자 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잔소리꾼이로구나.”

두 꼬마 여자 손님의 잔소리에 그만 장난스레 귀를 막습니다.

“아유 손떼세요. 이제부터 제 말씀 잘 들어야 해요. 나는 빨리 나이를 먹을 거고, 당신은 이제 나이 먹는 것을 멈추어야 해요. 나이 들어 늙었을 때, 나 혼자 외롭게 오래 사는 것 싫단 말에요. 나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고, 아셨지요?”

귀를 막은 두 손을 억지로 힘을 주어 떼어내며, 당신은 눈앞에서 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봅니다. 내 안색을 살피는 조금은 걱정스런 눈빛입니다. 그리고 와락 달려들며 목덜미를 안습니다. 당신의 포옹은 늘 그렇게 예상치 못한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뭔가 좋지 못한 상상이라도 한 것일까요? 왼쪽 목 언저리로 파고들 듯이 힘을 주어 깊숙이 끌어안습니다.

가벼운 떨림이 당신의 손목에서 느껴집니다. 움직임 없는 어깨위로 초여름의 매미 소리가 쓸고 지나갑니다. 당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규칙적인 진동이, 가슴을 통하여 전이되어 옵니다. 그 투명한 오월의 아침이, 낡고 오래된 전설이 터널을 통하여 우주의 끝에서부터 전하여 옵니다.

“당신 없으면 나는 절대로 혼자 살지 못할 거예요.”

“아저씨!”
“응? 왜?”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예요?”
“아니?”
“그럼요?”
“나 좋다는 여자가 생길 때까지만...”
“그럼 수염도 깎고 그래야지. 지저분해.”
“요런 꼬맹이들, 또 잔소리!”

지금 우리는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잠시 우리가 존재하던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가 운명의 장난으로 겹쳐진 것일 뿐입니다. 이젠 당신이 아무리 빨리 뛰어 온다고 해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때에, 모두 잊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머리가 생각하는 판단에 가슴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말을 타고, 조그만 텃밭에 물을 주고, 동네 꼬맹이들과 물싸움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직 어느 쪽이 비현실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추억과 현실은 손바닥의 앞과 뒤처럼 밀착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살아 내고 있는 것인지 그리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보다 명확한 일이 될까요?

저녁이 되자 앞산 너머로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검은 산의 실루엣 위로 비현실적인 푸른 달빛이 가득합니다. 개구리가 일제히 울기 시작하고, 밤은 다시 영원한 오월의 전설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아직 잠들지 못한 새 한 마리가 검은 실루엣으로 노란 달에 그림자를 남기며 숲으로 돌아갑니다.

“누구와 헤어졌는데 이렇게 시골에까지 왔어요?”

허참... 요즘 아이들은 참 당돌하지요?


들녘의 고요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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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0

재미솔솔(시니)님의 댓글

하하하.. 형.. 애들이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래요.. 그나 저나.. 구경가고잡당.. 디게 좋다고 소문이 나서리.. ㅋㅋㅋ 한국가면 술사가지고 영환이 데리고 가겠습니당.. 참 울형.. 승희형도 데리고 가죠.. ㅋㅋㅋㅋ 그럼 즐맥하세요.. 잼나는 글이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드라마의 영향일까? 여하튼 애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요. 한국에 오시면 들르세요. 오 사케도 좋지요. ^~^

영환군님의 댓글

ㅎㅎㅎㅎ
참 요즘 아이들이 예전같지 않죠.. ㅎㅎ
담엔 저도 말들하고 좀더 친해져서.. 멋지게 말타야지..
그럼 오늘도 명기형님 좋은 하루되세요.

iceberg님의 댓글

근데 항상 김명기님 글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위의 글은 실화를 바탄으로 쓰시는 글인가요? 아니면 그냥 소설인가요?

고등학교때도 늘 소설은 허구라고 배웠는데, 꼭 일인칭 화법을 쓰면 작자가 그 소설으 주인공처럼 느껴지는것 있었잖아요. 김명기님의 글도 읽을때마다 항상 헷갈립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긴 합니다만.

김명기님의 댓글

말이 호락호락 태워준대? 꿈도 야무지지! ^~^

김명기님의 댓글

글쎄요? 반반이라고 해두지요... ^~^

adam님의 댓글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을 현실과 맞물려 되돌아보는 실화소설..맞져?
명기형이 주인공도 맞는것 같구요.^^

(酎)클래식님의 댓글

5월 전설이면 생각하기도 싫은데 .
전라도분이면 기억하겠지만 5월의 전설이면 5.18을 연상시키는 그날이죠.
처참하게 쓰러지는 이제는 역사의 한페이지로만 남겨도 그 주인공은 너무나 떳떳하게 살고있다.

김명기님의 댓글

음 마음대로 생각하라구... 나는 노 코멘트! ^~^

IDMAKER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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