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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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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강

기분 좋게 마신 술이라도 기분 좋게 깨지는 않는다. 나는 머리가 묵직해질 정도의 宿醉(숙취)와, 피로와 落馬(낙마)로 뻐근한 몸을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길을 돌려 LP 중에서 송창식의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하게 웃는 미소가 인상적인 레이블을 턴 테이블에 걸었다. [창 밖에는 비오구요. 바람 불고요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공간에, 송창식의 애잔하고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듯한 낮고 잔잔한 음색이 특수효과의 안개처럼 거실 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바람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봄비는 회색의 아침 여명을 받아 은빛 물고기처럼 비늘을 반짝이며 땅을 적시고 있었다. 비는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기중의 소리를 빗방울
에 담을 수 있을 만큼씩 욕심을 내어 빨아들이는 것 같다. 비가 빨아들인 만큼 세계의 대기는, 새로운 기술로 소리를 모자이크 처리한 것처럼 더 고적해 졌고, 잠시 옅은 회색의 공간에 더 짙은 회색의 정물이 되어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화장실로 향하던 중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오른 손으로 벽을 더듬어 화장실의 불을 켜자, 어둠은 초속 30만Km/h로 물러갔다. 그 놀라운 속도는 바퀴벌레가 도망쳐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속도가 아닐까? 하는 대체로 쓸데없는 생각으로 화장실에 앉아 숙취로부터 필사적인 탈출을 하려 애쓰지만, 오늘은 달랐다. 누군가 노란 꽃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술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나의 기억 파일들은 녹이라도 슨 것처럼 빨리 열리지 않았다.

플...뭐로 시작하는 단어일텐데...  플로렌스 플라타너스 플라나리아 그리고 프리지아... 나는 마침내 알코올에 절어 너덜한 내 기억의 파일에서 그 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노란색 꽃 이름을 찾아냈다. 후리지아(Freesia ) 꽃말 : 천진난만함, 순진, 깨끗한 향기... 미소년 나르시스를 짝사랑하게 되었지만, 내성적인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그런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 애만 태웠고, 결국엔 나르시스의 죽음을 따라 샘에 몸을 던져 자살한 어리석은 님프의 이름이다. 잠시, 스스로 죽임을 완성시킬 만큼 심장을 괴롭히던 애태움을 돌아보았다. 가슴속에도 빗방울이 스며드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화장실의 거울을 보며 울어본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지된 공간이 턱 아래를 잠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나는 거울을 보고 운 적이 없다. 나는 눈물샘의 기능이 退化(퇴화)되어 버린 낡은 남자다. 세상은 내게 절제를 요구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남자라면 세상은 나를 절개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마침내 摘出(적출)해 버릴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행성에서는 남자의 눈물은 금지된 어떤 일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붉은 눈동자 속에서 내리는 비를 본 적은 있다. 비는 가슴에서 출발하여 눈동자로 흐르는,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강이었다.

필름과 복실이의 憺住宅(단독주택)을 만들어 주기 위한 페인트 등 몇 가지 물건을 사러 읍내에 나갔다. 자동차의 바퀴에 감기는 낙숫물 소리가 좌아악! 정겹게 다가온다. 와이퍼를 안단테(andante)와 모데라토(moderato)의 사이에 놓았다. 왼손의 손가락 두개만 핸들에 올려두고, 마치 새로 깔은 도로처럼 말갛게 씻겨 진 시골길을 달린다. 저수지에는 수많은 同心圓(동심원)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잠시 차를 멈추고 저수지의 수면에 氣泡(기포)가 되어 떠돌았다. 담배 한대가 하얀 연기로 증발되어 버릴 때쯤 아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멈추어 비 구경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고, 저수지 곁에서 동심원이나 셀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조그맣게 한숨까지 불어 내었다. 가슴을 들여다보니 처음 서울에서 담 장 밖의 삶에 들어설 때의 두려움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잠시 두터운 먼지를 털고 지나간 두려움을 떠 올려 보았다. 박제된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그저 바람처럼 스치며 지나가는 또 하나의 잔잔한 회상과 여울진 슬픔으로 퇴색되었을 뿐. 담배꽁초를 손으로 비벼 끄고 필터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비오는 저수지에다 마음을 씻고 돌아섰다.

읍내는 조용했다. 상점과 식당들은 문을 열지 않았고, 버스만 가끔 통학생들을 싣고 내리고 할뿐이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나 서울의 한적한 동네나 다름없이 거의 비슷해진 시골 읍내의 풍경이지만, 비가 내리는 소리를 찬찬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하늘을 담고, 나를 올려다보는 조그만 물웅덩이들이 여기저기 생긴 아스팔트가 영화장면 같은 거리의 스케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싱그러운 NAVY BLUE 물감을 대기 중에 풀어놓은 것 같이, 양 볼을 스치는 공기까지도 푸른 꿈결에 잠기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의 건너편에 있는 커피 자동 판매기가 보였다. 밀크커피 300원, 카페오레 400원. 나는 100원 만큼 사치해 지기로 하였다. 영화장면 같은 읍내의 비오는 수채화 속에서 빗소리를 듣는데, 그 정도의 입장료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비에는 무지개가 담겨져 있다. 그중 녹색이 땅에 내려와 숲이 된다. 붉은 색, 노란 색은 꽃잎이 되고, 또 MIDNIGHT BLUE 는 당신의 눈동자로 남아 영원한 그리움을 만들었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단 한 사람. 뇌를 덜어내기 전에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사람. 가끔씩 솟아나는 뜻 모를 미움마저도 그저 그리움이 되어 버리는 사람... 나는, 참 유치하기도 하지!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곁을 지나치던 러시아인이 잠시 돌아본다. 못 본체 고개를 돌리고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하늘을 바라보는 종이컵의 바닥에 빗방울 하나가 툭! 떨어진다.

차의 표면을 핥고 지나가는 숲의 모습은 이제 나무의 터널이 되어간다. 서식지에 돌아오자 비는 멈추었다. 차 문을 열고 나서자, 숲은 녹색에 바다에 잠겨 있었다. 젖은 나무줄기는 검은 색으로 收斂(수렴)되고 생명이 새로 돋아나는 불끈거리는 힘이 맹렬하게 뿜어내는 듯한 진한 녹색이 숲을 채운다. 차창과 자동차 바퀴에 붙은 연한 VIOLET 꽃잎을 바라보며 잠시 비가 개이는 숲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리움은 개이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개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꽃잎 사이에 버려 두고, 나는 두고 온 노래를 들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아직은 멀리만 보이는 강의 건너편 기슭에 닿기엔, 좀더 많은 봄비와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측백나무 숲을 따라간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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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여백님의 댓글

-,.-"

측백나무 숲길을 따라가보면...
발밑엔 언제나 가득한 낙옆..

언제 떨어졌는지.. 언제부터 그자리에 있어
색이 바래고 흙이 되어가는 ...

가려는 멀리만 보이는 강 건너편 기슭에 닿기도 전에
난 내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옆의 촉감에 정신을 놓는다..
-,.-"

이국에 땅에 와 버린듯한 착각에...

>>또 먼소리를 티이핑 했눈쥐... 비만 오면 정신이 오락가락
으~~알콜이 모자라요...

김명기님의 댓글

제가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 게신 느낌이 드네요. ^~^

넘힘든하루님의 댓글

사랑은 때론 흐르는 시간과 유,무채색 풍경앞에서 미화되고 혹은 변화며 과장되기도 하는 듯 합니다.
원래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기억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사랑만이 존재하는지도
그 변화도 사랑의 소중한 한 부분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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